'보관'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나요?
보관이라는 건 어쩌면 과거를 돌아보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현재를 더 의미 있게 만들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무릇 과거란 애써 다시 돌아보며 끊임없이 기억해 주지 않는 한 존재와 동시에 사라져 버리는 것이죠.
어릴 때 친구가 준 편지, 카페 휴지에 끼적였는데 우연히 맘에 들었던 메모, 열쇠를 잃어버린 자물쇠. 제 서랍엔 그런 것들이 있어요. 누가 보기엔 쓰레기일 수 있지만, 이 흔적들이 모여 저라는 사람을 만들었으니까요.
사라져 버릴 수 있었던 어떤 흔적들을 모으고, 기워 보관한다면 그저 지나간 '있었던 것'이 아닌, 의미 있는 '존재'로서 가치를 이어갈 수 있어요.
오늘은 존재가 흩뿌린 조각을 깁는 일, '아카이빙'에서 흩어진 생각을 담았어요.
By. Editor Sam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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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프리즘
🔴PRISM I_아카이빙(Archiving)이란
🟠PRISM II_아키비스트를 아시나요? 🟡PRISM III_우리에겐 왜 아카이빙이 필요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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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I_아카이빙(Archiving)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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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프리즘레터에서 들여다볼 주제는 '아카이빙'이에요. 아카이빙의 사전적 정의에 대해 먼저 살펴볼게요.
- 아카이브(archive) : 파일을 보관하다, 기록 보관소에 보관하다, 기록 보관소
- 아카이빙 : 수많은 기록물 중 가치가 있는 것을 선별하여 수집하고, 정리하고, 보관하는 일
아카이브는 '보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지속적 가치를 가진 기록을 보존하기 위한 모든 행위를 '아카이빙'이라 하죠.
최근에는 주로 '디지털 아카이빙'의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요. 매체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적 문제로 입는 손상을 피해 디지털 매체로 변환하는 일을 말해요.
또 아카이브는 '기록 보관소'라는 뜻도 가지고 있어요. 기록이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공공기관마다 기록물 보관실을 가지고 있고, 기록만을 위한 시설이 있기도 해요. 대표적으로 국내에는 영화 등 영상 자료를 보관하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있고, 북극에 위치한 '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도 있지요.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는 지구가 멸망한 후 살아남은 인류 생존을 위해 100만 종 이상의 식물 씨앗을 보관하는 거대한 보관소예요. 종자보관소 근처에는 '세계기록보관소'도 있는데요. 미국 달 착륙 사진, 이집트 피라미드 사진, 맥도날드 비밀 레시피까지🍔 미래를 위해 보관해야 하는 세계의 기억이 담겨 있어요.
여행 유튜버 빠니보틀이 노홍철, 궤도와 함께 세계기록보관소를 방문한 영상이 꽤 흥미로웠는데요! 궁금한 분들은 시청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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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빙'만 하는 전문 직업인이 있다는 것을 아시나요? 기록물을 아카이빙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아키비스트(기록연구사)라고 불러요. 기록물의 가치를 평가하고, 수집하고, 보존하는 책임을 지닌 사람이죠.
공공기록법에 따르면 공공기관은 필수적으로 1명의 아키비스트를 두어야 해요. 아키비스트가 관리하는 기록물들은 도서관의 기록물과는 다르게 분실 시 대체할 수 없는 고유성을 갖고 있어서 더 큰 가치와, 관리에 대한 책임을 지녀요. 자료 반출 시 보험에 가입하거나 대여료를 받는 경우도 있어요.
여러 분야의 아키비스트가 있지만, 문화예술 분야의 아키비스트가 대표적인 것 같아요. 지난 레터의 '아카이빙 대장' 김아혜님도 문화예술 기관에서 아날로그 기록물을 디지털로 변환하는 일을 하는 아키비스트였죠😊
아키비스트의 일이 더 궁금하다면, 60여 년간 한국 현대미술 아카이빙을 이끈 선구자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김달진 관장의 인생을 담은 <김달진, 한국 미술 아키비스트>를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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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SM III_우리에겐 왜 아카이빙이 필요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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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미 없어진 존재를 현재에 머물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있다는 점이 참 뭉클했어요. 누군가 내 삶을 그렇게 살뜰하게 수집하고, 보존하며 내가 꽤 가치 있는 삶을 살았고, 그래서 기억해야 한다고 애써준다면 얼마나 고마울까요?
어떤 한 존재를 만난다는 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세계를 수집하는 거예요. 반대로, 수집하고 기억하는 사람이 없다면 멀쩡히 존재하고 살아 숨 쉬는 사람도 죽은 사람이 될 수 있죠.
오늘의 마지막 프리즘 갈래는 김초엽의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수록된 소설 <관내분실> 속 아카이빙의 의미를 나눠보고 싶어요.
⚠️ 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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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엽의 단편 소설 <관내분실>은 사람이 죽은 후 뇌 속 뉴런의 시냅스를 복사해 데이터로 만들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도서관'에서 만날 수 있는 시대를 그리고 있어요.
주인공 지민의 엄마 은하도 죽음을 맞이한 후 도서관에 아카이빙되지만, 데이터를 찾을 수 있는 인덱스가 삭제되는 바람에 도서관 안에서 분실돼요. 분실된 데이터를 찾으려면 고인을 특정할 수 있는 물건을 가져와서 특정한 시냅스 연결을 키워드로 검색하는 방법밖에 없는데요.
은하의 딸 지민은 엄마를 특정할 수 있는 물건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당황해요. 그도 그럴 것이 은하는 그저 그림같이 '엄마'로만 존재하며 누구에게나 비슷한 의미가 있는 물건만을 소유했을 뿐, 인간 '김은하'를 특정하는 물건은 남기지 않았거든요.
우울증에 시달리며 지민에게 소위 '좋은 엄마'가 돼주지 못했던 은하의 괴로움을 지민은 이제야 비로소 조금 알 수 있게 돼요. 한 사람의 인생에서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어떤 특징도, 흔적도 없다는 건 너무 쓸쓸한 일이잖아요.
결국 도서관에서 분실된 은하를 찾아낼 수 있었던 물건은, 지민을 낳기 전 은하가 일했던 회사에서 만든 종이책의 표지였어요. '김은하'라는 이름을 달고, 인간 김은하가 고유하게 만들어낸 유일한 물건.
지민은 방대한 데이터의 세계에서 실종되었던 은하를 찾고, 도서관 속 은하를 만나 말해요. "이제 엄마를 이해한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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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를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꼭 누군가는, 꼭 단 한 사람만은 기억하고 이름을 불러줘야 의미를 얻을 수 있어요.
은하가 만든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지민은 은하가 어떤 사람인지 끝까지 알지 못했을 거예요. 이 세상엔 조용히 사라지는 중요한 것들이 너무 많아요. 잊혀 가는 중요한 기록을 발굴하고 그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더 많은 가치 속에 살게 될 거예요.
아키비스트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빈센트 반 고흐나 에밀리 디킨슨, 프란츠 카프카가 누군가의 발견과 주목이 없었다면 세계적인 예술가로 재평가될 수 있었을까요?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어느 곳에서, 아마 평생 모른 채 끝날 수도 있는 자료의 복원과 보존을 위해 누군가는 애쓰고 있겠죠. 가치 있는 데이터의 인덱스를 만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아키비스트들을 응원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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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인생 또한 바지런히, 집요하게 아카이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산란한 세상에서 나를 잃어버린다면, 누군가는 나를 단번에 찾아낼 인덱스가 있어야 하니까요.
나를 간절히 찾아야 하는 순간이 올 때,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는 고유한 '나만의 것'들을 만들어가도록 해요.
우리는 모두 '지속적 가치'를 지닌 존재들이고, 누구나 내 인생의 대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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