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에서의 좋은 기억이 있나요?
치과는 무서운 곳이에요. 기다란 마취 바늘, 치아를 갉아내는 각종 기구의 소리와 소독약 향기, 등받이가 내려가는 순간 무력감이 느껴지는 덴탈 체어가 있는 곳. 제아무리 어른이 되었어도, 노란 조명이 탁 하고 시야를 밝히는 순간의 긴장감은 어린 시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아요.
어릴 적부터 충치가 자주 생겼던 저는 사실 치과 전문가입니다. 이사를 가는 동네마다 치과를 옮겼으니까요. 여러 치과의사를 만났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치과는 제 치아 상태를 하나 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던 치과였어요. 치아가 어떻게 치료되는지 알게 되니 긴장감도 줄어드는 기분이었죠. 어떤 의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치과에서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니,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여기, '모두에게 편안한 치과'를 만들고 싶은 치과의사가 있습니다.
기분 좋은 대화가 긴장을 줄여준다고요. 환자들에게 유독 살가운 이 치과의사는 어린이 환자들과도 쉽게 친구가 되고, 어르신 환자들은 직접 말린 오징어를 손에 쥐여주시기도 한대요.
The Forge의 두 번째 인터뷰에서는, 모두에게 편안한 치과를 만들고 싶다는 ‘충치 대장’ 김혜인 님과 이야기를 나눠보았어요. 충치 치료의 전문가로서, ‘대장’을 넘어 ‘대가’가 되고 싶다는 김혜인 님의 살가운 치과는 어떤 모습일까요?
By. Editor 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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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충치 대장님! 충치 대장은 어떤 사람인가요?
안녕하세요. 저는 연세대학교 보존과에서 레지던트 2년 차로 근무하고 있는 치과의사 김혜인입니다.
사실 충치 대장이라는 말이 조금 부담스럽긴 한데요. (웃음) 열정으로 대장이 될 수 있는 거라면, 충치 대장이 맞는 것 같아서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대장이 ‘대가’는 아니니까요.
혜인 님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현재 충치 대장이 되었는지, 지금까지의 살아온 과정이 궁금해요.
저는 어릴 적에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였어요. 명확하고 빠르게 답을 찾는 과정이 제겐 놀이 같았거든요.
중학생 시절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UC 샌디에이고(UCSD)에 진학해서 생화학 공부를 하면서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어요. 아무래도 같은 과에 의과 대학이나 치과대학에 진학하는 동기들이 많아서 친구들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미국에서 학사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에 편입하여 수련하게 되었습니다.
중학생 시절에 유학을 떠났던 이야기부터 자세히 듣고 싶어요. 어린 시절에 어떻게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게 된 건가요?
제가 중학생 때, 아이비리그 캠퍼스를 투어 해주는 장학 프로그램에 참여했어요. 그때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신기한 경험을 했는데요, 제 옆자리에 교포처럼 보이는 승객이 앉았었어요. 그 승객은 헤드폰을 쓰고 있었는데, 고갯짓으로 리듬을 타고 흥얼거리면서 그렇게 긴 비행시간을 즐기더라고요. 그 모습이 어린 제 눈에는 너무 자유롭고 특별해 보였어요. 아이비리그 캠퍼스 투어를 하면서도, 대학생들이 캠퍼스 곳곳에 자유롭게 모여 공부하는 모습이 멋져 보였고요.
저도 그들처럼 미국에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귀국하고 나서 부모님께 미국에 유학을 보내 달라고 했어요. 당연히 처음에는 반대하셨죠. 저는 부모님께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 떼를 쓰기 시작했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결국 부모님도 유학을 어렵게 허락해 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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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샌디에이고 대학 암 연구소에서 조교로 근무했던 김혜인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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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생화학을 전공한 후, 치과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과정도 궁금해요.
다소 엉뚱한 시작일 수도 있는데요. 대학 전공과목 중 ‘유기 화학’ 수업을 제가 짝사랑하던 친구와 함께 들었어요. 모든 학생이 어려워하는 과목이었던 만큼, 열심히 공부해서 그 친구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거예요. 제 과제를 빨리 끝내고 그 친구의 과제까지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험에서 1등을 하게 되었어요. (그 친구와 잘 되진 못했지만요. 하하하)
그렇게 교수님의 눈에 들면서, 교수님 추천으로 ‘암 연구소’에서 조교로 일할 수 있었어요. 실력 있는 교수님, 동료와 함께 연구하는 것은 자랑스럽고 짜릿한 일이었어요. 하지만 연구를 계획하고 결과물을 보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고, 저에게는 그게 좀 지루하게 느껴졌어요. 저는 빠르게 결과물을 보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연구자의 길은 제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죠.
암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좋은 기회로 남미 지역 의료봉사에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당시 학생 신분이었던 저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의대나 치의대 봉사자들이 환자들의 불편한 점을 바로바로 해결해 주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였어요. 저도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연구보다 문제를 바로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에서 제 성향과도 잘 맞았고요. 그래서 치과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의사도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왜 꼭 치과의사였어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고 잘했기 때문에 의사가 되더라도 수술을 할 수 있는, 손을 많이 쓰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가 정도 많고 마음도 약해요. 눈물도 많고요. 성격상 생명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치과의사가 가장 적합할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충치 대장 혜인 님이 수련하고 계신 '보존과'는 치과에서 어떤 과인지 궁금해요.
치과에도 교정과, 소아치과 등 다양한 과가 있는데요, 제가 속해있는 보존과는 그 이름처럼 치아를 최대한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충치 치료’를 담당하는 과예요. 많이 들어보셨을 레진, 인레이, 크라운, 신경치료와 같은 처치를 하는 곳이죠.
동네 병원에서는 분명히 살릴 수 있는 치아인데도 경제적인 이유로 임플란트를 권유하는 경우도 있어요. 대학병원 보존과는 그렇게 발치 선고(?)를 받은 환자들이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찾아오는 곳이에요. 저희가 그런 환자들을 최전선에서 치료할 수 있다는 게 굉장히 뿌듯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충치 치료는 진행 속도가 굉장히 빠른 편이고, 치료 후 결과를 눈으로 정확하게 볼 수 있는데요, 이러한 특성이 제겐 큰 희열감을 줘요. 충치 치료 중 ‘신경 치료’는 치과의사들도 매우 어려워하는 술식인데, 남들이 잘 못하는 것을 저만의 특기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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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치 대장으로서 혜인 님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심미적으로 완벽한 수복을 할 수 있고, 자신이 있어요. 수복이라는 건 충치를 제거하고 치아의 기능과 모양을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제가 손으로 하는 건 뭐든지 섬세하게 잘하는 편이거든요. 수복물이 자연치아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예쁘게 수복하는 것이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차별점이에요.
또 충치 치료에 있어서 저만의 철학이 있다면, 치료의 과정을 환자분께 자세히 설명해 드리는 거예요. 긴 시간 동안 치료를 받다 보면 어떤 치료가 이루어지는지 궁금할 것 같기도 하고, 지루할 것 같기도 해서요. 충치 치료에 공포감이 있는 분들도 많으신데, 치료 과정에서 상세하게 설명해 드리는 것이 불안을 줄이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더라고요.
특히 어르신이나 아이들, 장애인 환자분께서 내원하셨을 때 보통은 환자가 아닌 보호자에게만 설명을 해드리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저는 환자분께서 100% 이해하기 어려우시더라도 본인에게 직접 설명을 해드리는 것 자체가 그 환자분에 대한 존경이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에요.
환자분들과 소통하는 의사라는 느낌이 많이 드는데요.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들이 있을까요?
저는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분들께서 좋아해 주시는데요. 어느 날은 한 할머니 환자분께서 본인이 쓰신 시집을 선물로 주셨어요. 근데 나중에 확인해 보니 시집 안에 오만 원권 지폐가 꽂혀 있는 거예요. 내원하실 때마다 용돈을 주고 싶다고 하셔서 한사코 거절했더니, 끝내 시집에 용돈을 꽂아서 주신 거였어요.
아무래도 어르신 환자분들이 내원하시면 저희 할머니가 생각나서 더 살갑게 대해 드리거든요. 제가 더 열심히 치료해 드리는 모습을 보고 용돈이라도 쥐여주고 싶으셨나 봐요. 그 마음이 너무 감사했어요. (용돈은 다음에 돌려 드릴 예정이에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환자는 초등학생 환자들이에요. 저랑 정신연령이 잘 맞아요. (웃음) “오늘 학교 빠지고 왔어요”라고 하면, “다음에도 오전에 진료 잡아줘야겠네!”라고 해요. 그러면 까르르 웃으면서 좋아해요. 이런 사소한 말 한마디로 환자들의 긴장이 풀리면 협조도가 올라가기 때문에 치료도 더 잘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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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치 대장에게도 올챙이 시절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 시절에 했던 실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실수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기억에 남는 실수가 두 가지 있는데요, 첫 번째는 *원내생 진료실에서 처음으로 치아를 깎는 술식을 할 때, 환자가 고모였어요. 진료를 2시에 시작했는데, 무려 7시에 끝이 났어요. 솔직히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제가 미숙하다 보니까 치아 하나를 깎기 위해서 고모가 입을 5시간을 벌리고 있었던 거예요. 아파서 발을 배배 꼬시던 모습이 지금까지 생생해요. 고모는 저를 사랑하는 마음에 아무런 컴플레인 없이 치료를 받아주셨는데, 그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워서 끝나고 엄청나게 울었어요.
두 번째 에피소드는, 마취를 반대로 한 적이 있어요. 오른쪽 치료를 해야 하는데 왼쪽을 마취한 거죠. 환자분께 바로 사과드리고 반대편에도 다시 마취했어요. 환자분은 양쪽에 마취를 당하신 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며 매우 당황하셨어요. 정말 진땀이 났던 순간이에요.
*원내생 진료실: 치과대학 학생들이 교수의 감독 아래 진료를 하는 곳
레지던트 수련 기간이 끝나면 이후 어떤 진로로 나갈 생각인가요?
레지던트 수련이 끝나면 저만의 치과를 열고 싶어요. 세상에 너무나 많은 치과가 있지만, 제 치과는 조금 더 따뜻한 느낌을 주는 치과였으면 좋겠어요. 제가 생각하는 건 성별, 나이, 장애 여부, 성 정체성 등에 따른 제약 없이 모두가 편하게 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거예요. 그러려면 치과를 열기 전부터 세심하게 공간을 기획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제 치과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야 모두가 편하게 문을 열 수 있는 병원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는 단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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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어떤 의사가 되고 싶으신가요?
저는 명의가 되고 싶어요. 대장을 넘어서 ‘대가’가 되고 싶어요. 단순히 “저 치과 잘한대” 정도가 아니라, 동료 의사들이 인정해 주는 사람이요.
가끔 교수님들께서 진료하다가, 이전 치료 상태를 보고 감탄하시면서 “로컬 병원에도 이렇게 고수들이 많다”라고 보여주실 때가 있거든요. 저도 그렇게 의사가 인정하는 의사, 진짜 명의가 되는 게 꿈이에요.
앞으로 인생에서 대장을 꿈꾸는 또 다른 일이 있을까요?
사랑 대장이요! 하하하.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각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고, 특별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매력을 찾고 사랑하는 게 저에게는 큰 활력을 줘요. 제가 할 수 있는 충치 치료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이 좋아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어떤 분야의 대장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의미를 두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의미를 두면 오히려 좌절하거나 후회가 밀려오는 순간들이 있더라고요. 그냥 제 앞에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니까 벌써 저도 병원 생활이 7년이 넘어갈 정도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 됐어요. 그저 꾸준히 하다 보면 어쨌든 어느 분야에 대장이 되어 있지 않을까, 그게 다른 말로 하면 열정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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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어떤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꾸준히 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새 충치 대장이 되어 있더라는 김혜인 님의 남다른 무기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었어요. 하루하루 쌓아온 실력으로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그 마음이요.
여러분에게도 무언가를 꾸준히 할 수 있게 하는 여러분만의 무기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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